1928년 디랙은 디랙방정식을 고안해 반물질로 가는 길을 가리켰고, 1930년 오펜하이머는 디렉방정식을 해석한 논문에서 반물질의 완전한 비전을 제시하였고,
디랙방정식과 반물질의 발견
오펜하이머의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지난 달 극장에 개봉했다. 외모만 보면 전형적인 이론물리학자로 보이지만, 영화를 보면 오펜하이머는 추진력과 조직력이 강한 인물로 그려진다.
오펜하이머는 1929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 부임해 미국에 양자역학을 소개한 인물이다. 그러다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천재성과 기존 지식에 얽매이지 않는 기발한 두뇌로 디랙방정식을 보고 양전자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1928년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폴 디랙은 뛰어난 수학 감각으로 양자역학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결합한 디랙방정식을 만들어냈는데, 원자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의 에너지가 양의 값은 물론 음의 값도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결론이 뜻밖이었다.
디랙방정식의 물리적 의미를 고민하던 디랙은 진공을 재해석하였고, 진공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음의 전자로 꽉 채워진 상태로 가정했다. 이때 외부에서 감마선과 비슷한 에너지 공급시 양의 에너지가 된 전자가 튀어나오면서 구멍이 생기는데, 이는 음의 에너지를 지닌 전자의 부재로 양의 에너지를 지닌 양전하 입자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결국 감마선 에너지가 둘 다 양의 에너지인 전자와 양전하 입자 쌍으로 바뀐 셈이다. 디랙방적식 자체는 이론물리학자 사이에 엄청난 찬사를 받았음에도 음의 에너지에 대한 해석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버클리에서 이 논문을 읽은 오펜하이머는 1930년 즉각 문제점을 파악하여 '전자와 양성자 이론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전자의 쌍이 되는 양전하 입자가 양성자라면 수소 원소는 순간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며 전자와 질량이 같은 미지의 입자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디랙은 자신의 방정식에서 도출되는 음의 에너지 풀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양성자로 인식하기도 했는데 오펜하이머는 만약 그 풀이가 양성자라면 원자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것임을 지적했다. 디랙은 즉시 오펜하이머가 비판하는 바의 중요성을 알아차려 이듬해 '실험물리학에서 아직 밝혀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입자를 반전자(anti-electron)라고 부를수 있다'라며 '이 대칭성이 자연의 근본 법칙이라면 어떤 종류의 입자라도 전하가 반대인 짝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후 입자는 전자와 질량이 같아야 하며 결국 양전자라는 새로운 입자임이 밝혀졌다
반물질에 미치는 중력의 영향을 살펴보면, 중력은 질량과 관련한 힘이고 반물질은 대응하는 물질과 같은 질량이므로 영향도 같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서도 질량이 같은 모든 물체는 내부 구조와 관계없이 무게가 같아야 한다. 반양성자와 양전자로 이루어진 반원자도 원자와 정확히 같은 중력가속도가 작용해야한다라는 이론이 나왔고, 그 무렵 유럽에서는 우라늄에 중성자를 때리는 실험을 분석하고 있었는데 이때 핵분열이라는 새로운 현상과 함께 엄청난 에너지를 활용한 폭탄의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맨해튼 프로젝트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미국이 주도, 영국, 캐나다 차지령이 참여한 핵무기 개발 계획으로 계획은 극미로 진행, 미국은 최초로 핵분열 반응을 이용한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프로젝트이다. 단순한 과학실험이 아닌 미국 전쟁부의 대량살상무기를 제작하는 군사 작전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모든 것이 기밀이었고 미국의 약 30군데 시설에서 연구가 진행되었다. 오펜하이머를 시작으로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등 전세계의 당대 최고의 두뇌인이 참여 했으나 아인슈타인은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우라늄 유통을 중단하면서 미국은 독일이 핵무기의 개발을 시작하였다고 판단하여 '나치 독일로부터 미국과 유럽을 지키기 위해'라는 목적으로 시작된 프로젝트이다. 1945년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이 성공리에 이루어졌고 핵 실험의 이름은 트리니티 실험이었으며 사용된 폭탄의 이름은 가젯(gadget)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영향
2차 대전 당시 일본제국은 1억 총옥쇄, 반자이 어택, 카미카제 등 무의미한 항전을 중 2번이나 실시된 원자폭탄 투하를 통해 일본은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 당시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급해진 미국 정부는 자신들이 전쟁을 끝내고자 나가사키에 2차 원폭을 감행한것을 밝혀졌고, 이에 맨해튼 계획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상당수 과학자들은 이러한 결과에 자신들의 연구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가장 강력한 전쟁 무기가 등장한 이후 역설적으로 강대국끼리의 전면전은 거의 자취를 감췄고, 그렇게 인류는 그 힘의 공포로 인해 세계대전과 같은 거대한 전쟁이 종식되었다.